강해설교 아웃라인 No. 127 ©mst
36주. 내 삶의 운전대 (누가복음 23:39~43)
모든이교회 주일설교(2016. 09. 04)
프롤로그
1. 오늘 말씀의 제목은 “내 삶의 운전대” 이다.
2. 예화 : 중국 시골마을 버스 안에서 있었던 일
예쁘게 생긴 여자를 험악하게 생긴 두 건달이 희롱합니다.
버스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아무도 모른체 합니다.
급기야 두 건달은 운전기사에게 정지할 것을 명하고 말을 듣지 않자 운전사를 테러합니다.
그리고 두 건달은 버스에서 여자를 강제로 끌어내려 버스 옆 풀밭으로 데려가 돌아가며 강간합니다.
버스 안에는 건장한 남자도 수십 명 있었지만 누구 한 사람도 정의롭게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냥 차창너머로 슬금슬금 눈치보며 그 광경을 구경만 합니다.
왜냐하면 남의 일에 참견했다가 칼이라도 맞을까봐 두려웠겠죠.
그때, 보다 못한 한 청년이 나서서 건달과 싸웁니다.
건달들은 청년을 칼로 무참히 찌르고 달아납니다.
여자가 울면서 옷을 차려 입습니다.
여자가 버스에 오르자 아무도 말이 없습니다.
창피한 건 아는지 여자와 눈길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모두가 무관심 한 척 창 밖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운전사는 테러 당해서 운전할 수 없고 여자가 헝클어진 상태로 운전석에 앉습니다.
그때, 피를 흘리며 청년이 차에 타려 하자 여자가 소리칩니다.
“왜 남의 일에 참견하시는 겁니까?” 라며 그 여자는 청년에게 화를 내고 버스 문을 닫아버립니다.
그리고 여자가 운전하는 버스는 출발합니다.
청년은 아픈 몸을 이끌고 시골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다 자동차 사고현장을 목격합니다.
교통을 통제하는 경찰관이 버스가 천길 낭떠러지에 굴러 떨어져 승객이 모두 사망한 사고라고 말합니다.
멀리 낭떠러지를 바라보니 방금 자신이 타고 왔던 그 버스였습니다.
그 버스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죄를 짓지 않았지만 다시 보면 모두 다 죽어야 할 만큼 큰 죄를 지은 사람들입니다.
오직 살만한 가치가 있던 그 청년을 버스에 타지 못하게 하고 그 여자는 승객들을 모두 지옥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3. 누가 운전대를 잡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a. 히틀러 같은 미친 운전자가 운전대를 잡으면…
b. 김정은 같은 사람이 운전대를 잡으면…
c. 예수님 : 허다한 무리들을 하나님나라로 이끌었다. 치유하고 회복시켜 주셨다.
4. 본문에서 누가는 예수님의 십자가 양 옆에 함께 못 박힌 두 명의 강도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있다.
5. 이들을 통해 “내 삶의 운전대”에 대한 교훈을 배우자.
첫째, 예수님을 대하는 사람들의 세 가지 자세가 있다(39~42절).
A. 삶(인생)의 운전대를 자기가 잡고 있는 사람이 있다(39절).
1. 39a절을 보자. “달린 행악자 중 하나” : 강도, 살인자…
2. 39b절을 보자. 운전대를 자신이 잡고 있는 사람의 특징이 나온다.
a. 비방한다. 비판한다. 욕을 한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b. 빈정댄다.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한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c. 여러분은 어떤가?
B. 삶(인생)의 운전대를 두고 갈등하는 사람이 있다(40절).
1. 40절을 보자.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a. 이 사람도 강도, 살인자다.
b. 처음에는 같이 예수님을 비방하고 빈정댔다.
2. 예수님에 대해 들었던 이야기, 자기 옆에 있는 그분의 모습이 변화의 동인이 되었다.
a. 예수님의 모습, 말, 행동을 보면서 생각한다.
b. 갈등하기 시작한다. “정말인가?”, “진짠가?”
c. 들은 것과 직접 보고 느끼고 체험한 것은 다르다.
d. 사람들은 여론에 영향을 받는다. 눈과 귀가 가려진다. 그것이 선입관, 선입견이다.
e. 사람은 민심이 아닌 천심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으로 살아야 한다.
3. 오늘날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부류이다. 갈등하며 산다. 회색지대에서 산다.
a. 적당히, 대충…
b. 너무 깊이 빠지지 않고.
c. 신앙이 왔다갔다 한다. 뿌리가 얕다.
4. 여러분은 어떤가?
C. 삶(인생)의 운전대를 예수님께 드린 사람이 있다(41~42절).
1. 41절을 보자.
a. 41a절 : “상당한 보응”_ 죄에 대한 댓가는 죽음이다. 지옥이다.
b. 42b절 : “옳지 않은” : “본래 제 자리가 아닌(out of place)” (아토포스)
① 처형대는 예수님이 계실 곳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② 자신이 삶의 운전대를 잡은 것도 제 자리가 아니라는 고백이다.
c. 내 삶의 운전대는 내 자리가 아니다. 예수님의 자리다. 그래야 제대로 된다. 나는 그 옆자리다.
2. 42절을 보자.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a.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고백이다. 가장 감동적인 고백이다. 운명을 바꾼 고백이다.
b. 한 강도의 위대한 신앙고백이다.
c. 죽은 후에도 영혼은 산다는 믿음,
그리스도가 사람의 영혼의 나라를 지배할 권세가 있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
그리스도는 임박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에 곧 들어가시리라는 것에 대한 믿음
d. 한마디로, “제 삶의 운전대를 이제야 비로소 주님께 드립니다. 주님이 운전해 주십시오!”
e. “이르되” : 미완료 과거이다. 반복적으로 간청했다는 것이다.
f. 자기가 인생의 운전대를 잡고 온 결과가 이곳이었다. 철저한 후회와 실패였다. 기쁨, 평안이 없다.
3. 이런 역사가 있기를 축원한다.
4. 예화 : 송재호 장로
탤런트 송재호 씨는 영화제작사를 차렸다가 망하는 바람에 엄청 많은 빚을 졌습니다.
그런데, 빚을 갚고자 사채를 쓰기 시작했고, 나중엔 빚으로 빚을 갚는 악순환이 계속되었습니다.
“너무 괴로웠고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늘 쫓기듯 찌들어 사는 인생이 너무 힘든 나머지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다.”고, 장로님은 밝혔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하면서 인생관이 바뀌고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양주 두 병을 한 입에 물고 나발을 불 정도였고, 하루 5갑의 담배를 피웠던 장로님은, 어느 지인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가게 되면서 차츰 안정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경제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아, 고통은 계속되었습니다.
송재호 장로님은 “50년간, 빚만 갚았다. 참 희한한 인생을 살았다. 빚과 이자까지 주다 보니, 내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더라.”고 털어놨습니다.
5. 누가복음 5:8(1년의 시간이 흐른 뒤의 고백), 마태복음 16:16 베드로의 신앙고백
6. 요한복음 20:28. 도마의 고백
7. 수많은 사형수들의 고백이기도 하다.
둘째, 삶의 운전대를 주님께 드린 결과가 있다 : 에덴의 회복(43절).
1. 43절을 보자.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a. 낙원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이자 의인들의 영원한 본향인 천국의 또 다른 이름이다.
b. 70인역은 ‘에덴동산’을 지칭하는 데 바로 이 헬라어 단어를 사용한다.
c. 따라서 타락 이전에 에덴동산에 존재했던 하나님과의 친밀하고 개인적인 교제의 회복이다.
2. 삶의 운전대를 주님께 드리면 에덴이 회복된다. 천국 백성이 될 뿐 아니라, 에덴이 회복된다.
3. 예화 : SBS 생방송투데이, 봉화오지마을 그리스도인
4. 비행기를 참 많이 탔다. 엄청 많이 탔다.
그렇게 비행기를 많이 탔지만 나는 한 번도 비행기를 내가 직접 조종하려고 하지 않았다.
자동차 운전 했으니 비행기도 한번 조종해보겠다!
내가 만일 비행기 조종사에게 “내가 자동차 운전을 30년도 넘게 했으니 비행기도 한 번 조종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이야기한다면 그건 심하게 말해, 미친 것이다.
확률은 거의 없지만 그때 마침 조종사도 미쳐서 내 말에 동의하고 날아가는 비행기의 조종간을 나에게 맡긴다면 비행기는 추락이다.
나는 비행기는 조종사가 조종해야만 한다는 것을 안다. 나는 그보다 중요한 한 가지를 더 알고 있다.
그것은, 나와 세상은 하나님이 조종하셔야만 안전하다는 것이다.
미숙한 어린아이들이 모르는 것이 있다. 그것은 모른다는 것을 모르고, 못한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텔레비전에서 ‘아톰’, ‘마징가Z’, ‘슈퍼맨’ 같은 만화영화를 상영하면 그 다음날 골목에는 목에 보자기를 묶고 날아다니는 놈들이 나타난다. 그건 매우 정상적인 일이지만, 그러나 매우 위험한 일이다.
우리는 슈퍼맨이 아니다. 자신이 슈퍼맨인 줄로 착각하면 그때부터 그의 삶은 위험에 처하게 되고 만다.
더구나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하나님이 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인하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도 문제가 없으려면 우리가 전지전능하여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는 무지하고 무능한 존재다. 무지무능함에도 그 존재가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자신과 세상을 조종하려고 한다면 그 결과는 추락이다. 사망이다. 멸망이다.
하나님나라의 삶을 살고 누리기 위하여 우리 인간이 지켜야 할 룰이 하나 있었다.
단 하나의 룰. 그것은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 선악과의 명령을 통하여 우리와 분명히 하고자 하시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당신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자리를 인간에게 빼앗기기 싫어서 정하신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생명을 보호하시고 지키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사탄이 우리에게 지금도 하는 말, ‘선악과를 따먹으면 네가 하나님이 될 것’이라는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따먹고 스스로 자신의 하나님이 되려 하고 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을 하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허락해 주셨다. 다시 말해 하나님나라를 허락해 주셨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그리고 하나님을 자신의 주(Lord)로 고백함이 하나님나라의 열쇠(key)임을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 즉 하나님나라에 들어감은 오직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믿음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하나님을 자신의 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 믿음이 하나님나라의 유일한 조건이다.
비행기는 조종사가 조종해야 안전하고, 나와 세상은 하나님이 조종하셔야만 안전하다.
내게도 원죄가 있어서 본능적으로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경향이 있다.
주인이 되려고 하는 본능이 있다. 나는 철저히 그것과 싸울 것이다.
마하나임의 군사로서 반드시 싸워야 하고, 싸워서 이겨야만 하는 전투는 바로 ‘자기 자신과의 전투’이다.
그것을 예수님은 ‘자기부인’이라고 말씀하셨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면 결국 하나님을 부인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불신앙을 가지고는 절대로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나라는 오직 믿음으로만 들어가고 누릴 수 있다.
5. 예배, 말씀, 기도, 기쁨, 평안, 감사… 삶의 운전대를 주님께 넘긴 결과이다.
6. 이사야 51:3
에필로그.
1. 초청기도
2. 폐회찬송_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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